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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일한 다짐

by. @rnehrrPrn

※블러디드 3권의 연재분 스포일러가 일부 함유되어 있습니다.

막시민은 생각했다.


'도대체 내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지?'


막시민은 멍한 표정으로 와인을 홀짝였다. 현실감 없는 일이라면 2년 전에 신물이 나도록 겪어본 사람으로서 뭔가 크게 꼬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좀 수상한 고용인이 생기나 했더니 네냐플이 뒤집어지고, 팔자에도 없는 플레상스 경 노릇을 하게 된 것도 모자라서 갑자기 목숨을 위협받는 신세라니, 뉘 집 개 인생도 이렇게 험하진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가장 문제인 것은.......


짝!
촤악!
.......


막시민은 여러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면서도 대화까지 나눌 수 있는 신묘한 기술의 소유자였고, 그걸 모르는 데보라는 포도주를 더 마신다면서 잔을 꼭 붙잡고 있는 인간의 코앞에서 박수를 쳤다. 문제는 그 박수 소리가 예상보다 컸고, 막시민이 드물게도 정말 넋이 나가있었다는 데에 있었다. 취해서 반쯤 졸고 있던 청어절임이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와인 잔을 붙잡긴 했지만 이미 와인은 멋지게 쏟아져 있었다.


“미안해요. 그렇게 놀랄 줄 몰랐어요.”
“됐어. 쌍방과실이지.”


강제로 플레상스 경으로 돌아온 막시민은 위층으로 올라가 갈아입을 옷을 찾았다. 쏟아진 와인의 양도 많지 않아 목에 걸고 있던 크라바트를 희생시키는 걸로 충분했다. 괜히 망가진 가구도 관찰하고 창을 열었다 닫기도 하며 바쁘게 움직였지만 그가 할 일이 많아봤자 거기서 거기였다. 막시민은 그나마 깨끗한 담요를 주워 의자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 전에 망가지기 쉬운 안경을 벗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곤 담요를 한 번 걷어찼다.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반해서.......'


이건 명백히 스스로 판 무덤이었다. 길가의 고양이도 의심하며 지내야 할 판에 그렇게 비밀이 많은 애한테 마음을 덜컥 줘버리다니. 어렴풋이 호감이 생긴 건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허구한 날 멍하니 정신을 놓고 지낼 줄은 몰랐다. 앞날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지만 왜 가만히 두라는 사람에게 매달리고 싶어졌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짝사랑 같은 건 정신 건강에 좋을 것 하나 없는데 아무래도 네냐플에서 마법사 특유의 정신 나감이 옮은 것 같았다. 기대해봤자 잘 될 리가 없는데.
함부로 기대했다가 초라해지는 건 딱 질색이었다. 고백이나 연애 같은 건 자신과 어울리지도 않았고, 사심 때문에 도왔다는 여지가 생기는 것도 싫었다. 순전히 그래야 하기에 건넨 호의에 불순물을 끼워 넣어 물을 흐릴 생각은 없었다. 리체에겐 샐러리맨에 대해 말해주는 것으로 해결되었지만 이번엔 증명할 방법도 없으니 내색하지 않는 게 여러모로 좋을 터였다.
생각을 굳힌 막시민은 비장하게 담요를 여미며 잘 태세를 취했다. 술도 마셨겠다, 유일하게 형편이 나아진 의자도 있겠다, 얼굴 마주치지 않으려면 일찍 잠드는 게 나았다. 다행히 몸에서 힘을 빼자 금세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가라앉은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 * *


이스핀은 발소리를 줄였다.
두 인질이 포도주 두세 병에 청승맞게 울고 있기에 조용히 해놓고 왔건만 그러거나 말거나 ‘공주님’은 미동도 없었다. 이스핀은 신속하게 호흡과 맥박을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쉬곤 멀쩡한 의자를 골라와 앉았다. 누가 진짜 업어 가면 어쩌려고 이럴까. 밑에서 카드게임을 벌여도 모를 기세였다. 술기운에 수다나 떨어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깨우긴 그른 것 같았다.


‘...이렇게 보니 좀 어려보이네.’


의자에 대충 걸어놓은 옷뿐만 아니라 머리카락에도 튄 포도주 때문에 영락없는 주정뱅이 같았지만 표정이 순하니 밉지도 않았다. 잘 때도 얼굴을 찡그리고 잘 것 같았는데 의외로 얌전했다. 하긴, 처음에도 그렇고 예상대로 행동할 때가 더 드물었지. 협박해서 선금까지 쥐어줬는데 도망쳤을 땐 반쯤 죽여 버릴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지켜주고 있으니 우스울 노릇이었다. 막시민을 고른 게 최악의 선택인지 최고의 실수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다른 사람을 구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결국은 뜻이 맞아 행동하는 것 뿐, 상황에 따라선 인사도 없이 떠나야 한다. 그녀를 알루에트라고 부르던 유일한 사람이 사라진 후 이스핀의 삶은 평탄했던 적이 없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시시각각 의심하고 날을 세우는 일정을 소화하고, 때때론 시커먼 강물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해도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모조리 해내야만 했다. 비록 그 끝이 실패라고 하더라도. 그 싸움에 누굴 끌어들일 순 없다. 친구도 아닌 자를 돕겠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만약에 살아남는다면........


오토마톤을 모으고, 오빠를 찾고, 그 자와 싸워서 여태껏 그래왔듯 어떻게든 살아남는다면 찾아가야지. 
오를란느, 그 서늘한 악의로 가득한 땅을 완전히 벗어날 순 없겠지만 그 자를 이긴 후라면 못 할 게 뭐가 있겠어? 공녀라는 것을 숨긴 것은 걱정이지만 진심으로 사과하면 조금은 풀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가끔씩 좋은 술을 들고 찾아가면 그 정도는 어울려주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썩 나아졌다. 그리곤 잠시 머뭇거리다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동료 사이엔 지나치게 다정한 행동 같았지만 어차피 자고 있는데 뭐 어때?
그대로 일어나 앉아있던 의자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문을 나서기 전,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아마 영영 친구가 될 수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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