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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막시민!"

광장 한가운데, 수많은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선명한 뭔가가 튀어나와
막시민 앞에 섰다. 흰 블라우스에 짧은 스웨터를 겹쳐 입은 소녀였다.
그러니까, 틀림없이 소녀였다.


막 불어온 바람에 무릎을 넘는 하늘색 치마와 긴 띠가 휘날리고
손에는 연한 모랫빛 가죽으로 지은 여행 가방이 있었다.
그 뒤로 수많은 사람들의 겨울 외투가 물결처럼 흘러갔다.

직후, 상대의 얼굴을 알아본 막시민의 얼굴에 혼란, 당황, 의혹이 차례로 스쳐 갔다.

"너……."

짧은 머리 양쪽에 핀까지 꽂아 올린 이스핀이 싱긋 웃더니 덧붙였다.

"……선배?"

막시민이 할 말을 잃은 이유는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첫째로 이런데서 마주칠 줄은 상상도 못 했고,
둘째로 남자아이인 줄 알았던 상대가 여자 옷을 입고 있고,
그런데 그게 자연스러울뿐더러 잘 어울리고 뭐랄까,
이 모습 자체가 켈티카에 다다를 때부터 줄곧 머릿속을 맴돌던 시절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라고 딱 잘라 말할 순 없지만 잃었다는 것만은 알았던 순간들을.

기억이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는 곳에서 그건 그때도 내 몫이 아니었다고,
되찾을 수도 되찾아서도 안 된다고, 그리고 지금은 다른 누군가가 되어야 하니까
더 생각하지 말자고 애쓰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뛰어들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가 버린 페이지에 미련이 남아 뒤적이고 있는데 불쑥 내민 손이 차르륵 넘기더니
새 페이지를 펴 가리키며 '여기를 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상대가 이스핀이어서는 아니었다. 그 정도로 잘 아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저 우연히, 언젠가 좋아했던 풍경을 빈 종이에 끄적여본 듯 닮은 것뿐이었다.
그 여름이 꼭 저런 색깔이어서. 다 알지만, 그런 채로도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주 약간 숨이 막히는 것 같다.

그러나 간신히 호흡을 삼키고 나온 말은 이랬다.


"너 왜 여기 있냐?"

"글쎄. 난 내가 있고 싶은데 있으면 안 되나?"

갸웃하며 말하더니 곧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

.

.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속지 않았다. 재주가 뛰어나서 제법 도움이 되나보다 싶더니

고작 나흘만에 맨 밑바닥에 있는 비밀을 파내버렸다. 이까짓 시시한 실마리만 갖고도.


비밀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정말이지 주머니칼 하나만 쥐고도 능히 무덤을 파헤칠 재주다.

이 탐정을 어떻게 해야 할까…

"표정 보니까 네 상태를 조금 알겠는데."

그때 막 양파 수프가 나왔다. 막시민이 수프를 이스핀 앞으로 밀어주더니
이스핀이 든 잔을 건너다봤다.

"이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일은 나만이 짊어질 수 있다. 다른 누구한테도 못 나눠준다,
뭐 이런 종류의 자의식 과잉 있잖냐? 하지만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다 도움 받고, 도움 주고, 신세 지고, 은혜 갚고, 좀 떼어먹었다가, 더 얹어줬다가, 그런 거 아니냐?
그리고 그거 맛없냐? 다른 거 시켜."

"……."

이스핀은 물끄러미 막시민을 보며 자신을 향해 말했다. 
저 말이 맞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혼자 있고 싶진 않았어. 실은 난 사람들이 좋아.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 틈에 서서 웃는게 좋아.
무서웠을 뿐이야. 그들이 모두 입을 다물어버릴까 봐. 말하지 못하게 된 그들 틈에 혼자 서 있게 될까 봐 너무 무서워.

그런데 왜 네 말을 믿고 싶을까.

"그래. 비밀을 꿰뚫어 보는 것이 탐정의 역할이지."

단 한 번이라도.

"너라는 애한테는 결국 비밀을 감춘 채로 도움을 얻을 순 없었네."

이 사람이 내 삶에서.

"선을 넘어올 만큼 뛰어난 너니까 처음으로 선택권을 줄게.
비밀을 듣든가 아니면 지금 일어나서 떠나."

퇴장하지 않을거라고.

"그 비밀은 아주 재미없는 거야. 동료가 된지도 고작 나흘째니까 지금이 선택하기에 적당한 때겠지.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라. 이걸 알면 넌 나한테서 벗어나기 어려워져. 알았기 때문에 널 그냥 보내줄 수 없게 되니까.

넌 나를 아직 잘 몰라. 내가 왜 사람을 안믿는지,

왜 앞을 가로막는 자를 죽여버릴 작정으로 덤벼드는지,

프시키를 다룬다는 내 힘의 정체가 뭔지.
비밀을 듣고 나면 이 위험천만한 길을 너도 끝까지 가야 하는거야.

하지만 생각해봐. 넌 그럴 필요가 없어.
적당히 버티다가 심볼리온의 수배가 풀린 뒤에 네냐플로 돌아가면 그만이야.
탐정께서는 의뢰받은 사건만 해결해주고 깔끔하게 사라지만 된단 말이야."

믿어도 될까.

그런말을 빠르게 내뱉는 이스핀을 지그시 보고 있던 막시민은
이윽고 메뉴판을 집어 내밀며 말했다.

"말이 길어질 모양이네. 그전에 마실 거나 새로 시켜."

"너 지금 수렁으로 걸어들어가는 거야."

이스핀이 메뉴판을 받지 않자 막시민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너 진짜 겁 많네."

베베이스핀.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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