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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낯선 사람

by. 히기힉 @hogya1226

※블러디드 3권의 연재분 스포일러가 일부 함유되어 있습니다.

막시민 리프크네는 바닥을 거칠게 굴렀다.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려 얼굴을 그대로 부딪치는 것만은 막았지만 땅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지다시피 한 몸의 나머지 부분은 어쩔 수 없었다. 격통에 잠깐 숨이 막혔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바로 튕기듯 일어나 주위를 경계했다. 어지러워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으나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검과 마법이 어지럽게 오가는 신화적 난장판에 휘말려 든 일반인이 늑장을 피워서야 다음 순간에 바로 머리가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살기 어린 칼날이나 흉흉한 주문 같은 것은 날아들지 않았다. 주변에 흩어져 싸우던 동료들과 적들의 기척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애써 흔들리는 초점을 맞추자 비뚤게 걸린 안경테 안으로 보이는 것은 방금 전까지 있던 황무지가 아니라 어느 도시의 뒷골목 비슷한 곳이었다. 판잣조각이 굴러다니는 지저분한 바닥은 방금 전까지 비가 내리다 그친 듯이 조금 젖어 있었는데, 막시민은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비 한 방울 구경한 적이 없었다.

 

"이게 무슨…… 윽."

 

머리뿐 아니라 온몸이 울리는 것 같은 끔찍한 두통이 한발 늦게 밀려왔다. 다리가 휘청일 지경이라 막시민은 반사적으로 가까운 벽을 짚었다. 비단 강보에 싸여서 살아온 인생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끔찍한 두통은 전에 겪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 딱 한 번 있다. 산산조각이 난 듯한 머릿속에서 이제는 백 년쯤 전의 일인 것처럼 느껴지는 친구의 웃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티치엘의 이동 마법석……!"

 

티치엘이 만일을 대비해 하나씩 나눠주었던 보석들 중 막시민 자신의 것은 지금도 소멸하지 않고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애초에 난전의 한중간에서 공격을 피하며 바이올린을 켜느라 쓸 틈도 없었다. 흩어져 싸우던 친구들 중 도대체 누가 오브리의 검이 떨어지기 직전 마법석을 써서 그의 목을 붙여놓았을지, 막시민은 추리할 필요 없이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애를 밀쳐내고 쇄도하는 칼날 앞에 대신 넘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네냐플에서 몇 번이나 임상실험 대상이 되어주었던 막시민은 이 마법석의 효력과 사용 조건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약재를 더해도 끝까지 고칠 수 없었던 부작용인 두통이 서서히 잦아들자 그는 대로변으로 이어질 만한 길목을 가늠해 걷기 시작했다. 우선은 샤를로트가 자신을 어디로 보낸 건지부터 알아내야 했다. 그래야 연락이나 이동 방도를 찾아낼 수 있다. 마음 같아서야 지금도 싸우고 있을 친구들에게 당장 돌아가고 싶었지만 순간이동을 경험한 사람은 직후 한 달 동안 마법석을 사용할 수 없었다. 연구 윤리를 철저하게 준수하는 마법사인 티치엘이 피험자의 막대한 신체 부담을 줄이기 위해 걸어놓은 제약이었다.

 

"길 좀 묻겠습니다."

 

한적한 골목에서 겨우 한 사람 마주친 행인은 대답 없이 막시민을 쳐다보았다. 진흙탕에 험하게 구른 흔적이 적나라한 코트를 미심쩍게 흘끗거리는 눈길이 노골적이었다. 막시민은 초조한 마음을 숨기고 최대한 순박하고 무해한 얼굴을 꾸며내며 양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빨리 가려고 골목으로 잘못 들어왔다가 길을 잃은 것 같은데, 아휴 여기 정말 길이 좁네요. 여기가 어디죠? 큰길로 나가려면 어떻게 가야 합니까?"

"보르페르 거리 3번가인데... 어느쪽에서 들어오셨수?"

 

행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막시민이 모르는 지명이었고 독특한 억양도 다소 귀에 설어 한 번에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이런 남루한 골목에도 제대로 붙어있는 번지수며 길바닥에 번듯하게 깔린 포석을 보아 제법 번성한 도시가 틀림없었다. 기후로 봐서 하이아칸이나 트라바체스 쪽은 아닐 테고. 이동 마법석의 목적지는 사용자의 의향에 따라 발동되었다. 샤를로트가 안전지대로 떠올렸을 만한 도시들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가늠하며 막시민이 시골뜨기 행세를 이어나갔다.

 

"아, 제가 여기 사람이 아니어서요. 듣고도 또 까먹었지 뭡니까? 중앙 광장이 어느 쪽이죠?"

 

이만한 크기의 도시라면 어디든 그렇게 불릴 만한 공터 하나쯤은 있는 법이다. 어리숙한 표정이 그럴 듯했는지 행인은 별다른 의심 없이 친절하게 여행객을 걱정해 주었다.

 

"걸어가기엔 먼데. 저쪽으로 나가면 승합마차가 곧잘 다녀요. 나라면 그걸 타고 가겠수."

"아이고, 길을 한참 잘못 들었나 보군요. 많이 먼가요?"

"못 걸을 거리는 아니지만, 해가 곧 떨어질 텐데 요새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야경꾼들이 영 예민해서 말이지. 아노마라드 사람이 그런 꼴로 밤거리를 서성이다간 금방 세큐리테 지소로 끌려가 귀찮은 꼴을 당하게 될 거요."

 

적어도 세 가지는 확실했다. 첫째, 여기는 아노마라드가 아니다. 둘째, 이름 모를 이 도시에는 세큐리테라는 치안 유지 단체가 있다. 셋째, 일면식이 없는 사람끼리도 자연스레 공감할 만한 수상쩍거나 흉흉한 일이 최근 일어난 곳이다. 세 번째에 대해서는 특별히 감이 잡히는 바가 없었지만 두 번째는 큰 단서였다. 공식적인 이름이 있는 자치조직을 둘 만한 대도시는 대륙 전체로 따져도 몇 군데 안 된다.

게다가, 이국적인 발음의 단어는 막시민이 일전에 누군가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곤란하게 되었군요. 왕립 마법 학원에 다니는 가족을 찾아왔는데…… 거기가 중앙 광장 근처가 맞지요? 마차 요금이 어느 정도 되는지 혹시……?"

"전혀 달라요. 누가 완전히 잘못 가르쳐줬구먼? 아마 4엘소 정도 나오지 싶은데, 그 근처엔 대공 전하께서 자주 다니시는 사냥터가 있어서 근위병들이 자주 순찰하니 조심하시고."

 

역시 오를리가 맞았다.

급박한 순간 샤를로트가 가장 안전하게 느꼈을 대도시라는 조건에서 이미 정답이 반쯤 나온 것이나 다름없기는 했다. 막시민은 큰길가로 나가 친절한 행인이 일러준 대로 승합마차를 탔다. 그는 이 도시에 와 본 적이 없었지만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샤를로트와 함께 다니면서 몇 가지를 들어 알고 있었다. 잠시 다녔다는 왕립 마법 학원에 대해서라든가, 거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에투알제2본부의 위치처럼 사소하지만 충분히 유용한 정보들 말이다. 공녀의 직속인 제3분견대는 막시민 리프크네의 존재를 알고 있을 거였고, 공녀가 가 있는 황무지로 통하는 이동 수단 또한 마련되어 있을 것이었으므로 그쪽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요새 시국이 수상하다니, 오를리에 무슨 일이 있었나? 막시민은 좁고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 앉아 최근 자신이 이 도시에 대해 들었던 것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지만 특별히 짐작이 가지는 않았다. 물론 남의 나라 수도에(앞으로도 남의 나라일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겠으나) 무슨 사건사고가 있든지 말든지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지금쯤 팽팽하던 접전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을지, 혹시라도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없을지에 다시금 신경이 쏠려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잠시라도 생각을 돌리려는 노력을 멈추면 어김없이 위태롭던 난전의 풍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 음흉한 자식들은 철강 길드가 아니라 암살 길드로 개명해야 맞겠던데, 티치엘의 보호막이 없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지. 에투알 쪽 마법사가 도와주러 가는 것까진 봤는데 그거 아직도 유지되고 있을까. 숯가마 놈은 척 보기에도 실력자로 보이는지 여러 놈이 붙어서 싸우고 있던데 괜찮을까. 산란한 심상들이 두서없이 머릿속을 떠돌다 보면 어김없이 한 점에 이르고는 했다.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무사한 모습. 때맞춰 밀어낼 수 있어서 안도했었는데, 정작 그 애는 전혀 그렇게 여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딱딱해진 얼굴도, 마구 화를 내는 얼굴도 많이 봐 왔지만 그렇게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막시민은 이미 잔뜩 구겨진 코트 자락을 주머니 속에서 꾹 쥐었다.

다행히 막시민이 달리는 마차의 문을 열고 뛰어내리기 전에 마차가 멈췄다. 막시민은 느긋하게 삯을 셈하는 마부에게 손에 잡히는 대로 동전 몇 개를 집어주고 급박하게 뛰었다.

 

"어허 잠깐, 이거 뭐야? 나이도 젊은 양반이 어디 시골 바닥도 아니고 오를리 한복판에서 돈을 가지고 이런 장난질을…… 시큐리테에 한 번 끌려가 볼 테요?"

 

그를 내려준 마부가 벌컥 화를 내며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거였다.

 

"장난질이라뇨?"

 

막시민은 당황했다. 곤란하게도 그 주변은 번화가라 사람들이 많았고,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어디론가 뛰어가려다 붙잡힌 그는 정말로 수상한 짓을 저지르고 도망치려던 사람처럼 보였다. 요금을 덜 주기라도 했나? 하지만 그 정도 일이라기엔 화를 내는 정도가 지나쳤다. 마부는 기세등등하게 방금 막시민에게서 건네받은 돈을 흔들어댔다.

 

"이 은화 말요. 어째 손에 닿는 느낌이 이상하더라니 바쁜가 보다 하고 대충 넘어갔으면 큰일 날 뻔했지! 화폐 위조가 얼마나 큰 죄인데 이런 걸 당당히 내미나 그래, 간도 크게?"

"위조 화폐요?"

 

막시민은 한시바삐 돌아가려고 조급하게 굴던 것도 잠깐 잊을 정도로 놀랐다. 그가 낸 돈은 네냐플 교수들이 준 것이었고(그간 같이 다닌 동료는 씀씀이의 기준이 국가 예산 급인 사람이었으므로 여행 가방 속의 금화가 아직도 제법 넉넉하게 남아 있었다), 그들은 물론 정교한 위조 화폐를 만들 실력을 충분히 갖췄지만 세상이 뒤집혀도 그럴 리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돌멩이로 순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뭣 하러 금속 함량과 무게를 저울질해가며 가짜 동전 몇 개를 만들겠는가?

 

"아무래도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

 

시골뜨기 요슈아의 자아 대신 돈깨나 있는 신사 플레상스 경의 자아를 다시 불러내는 중이던 막시민의 말을 무작스레 끊으며 마부가 언성을 높였다.

 

"발행연도가 993년이라니, 뭐 십 년 뒤에서 미리 가져오기라도 했단 말이야? 사기를 칠래도 좀 성의있게 쳐야지!"

 

알아듣기 어려운 말들에 막시민은 눈살을 찌푸렸다. 비단 이국적인 억양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아저씨가 뭘 착각하기라도 했나, 갑자기 날짜가 어쩌고 바로 작년을 가지고 십 년 뒤니 뭐니…….

아. 막시민은 눈을 부릅떴다.

티치엘은 이 마법석에 사용자가 원하는 곳으로 이동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는 힘을 걸어놓았다. 보통 마법사들의 순간 이동은 아주 짧은 거리에 국한되었고 대상도 자기 자신이나 함께 있는 객체 정도인 점을 생각하면 그녀의 어마어마한 마력과 운용능력을 짐작할 수 있는 가히 천재적인 발명이었다.

하지만 이동이라면,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고 들어 본 적도 없는 일이지만, 다른 영역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십 년 뒤라니, 그럼 지금은……."

 

마부는 이제 사기꾼이 무슨 다른 수를 쓰려는 건지 의심스러운 듯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낯선, 아니 낯익은, 한참 전에 지나가야 마땅했을 숫자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왜, 들켰으니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행세라도 할 참인가? 아니면 이것도 켈티카에서 공화정 놈들이 쓰는 새 달력이니 뭐니 하는 것처럼 또 다른 달력이라서 그걸로는 올해가 984년이 아니라고 우길 셈인가?"

* * *

 

"그래서, 시간 여행자라고."

 

명백히 사기꾼을 보는 듯한 눈길이었다. 주장하는 자신도 백분 이해가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막시민은 최대한 신뢰가 갈 법한 진중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 애썼다. 안경이 없어 초점이 잘 맞지 않았던 까닭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 외에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양팔과 다리가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묶여 있는 막시민을 기묘한 표정으로 마주 보던 소년이 시위에게 말했다.

 

"재갈이라도 풀어주도록 해. 어차피 마법 능력이 있는지는 다 검사해봤다며?"

"안 됩니다, 연하. 말씀대로 마법사가 위험이 될 만한 능력은 없다고 보증해 줬습니다만, 또 어떤 확인되지 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자입니다. 이 자가 증거라고 말한 정보들이 어떤 경로로 새어 나간 건지도 아직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중에는 심지어 오를리 궁의 경호 교대 루틴이나 소위 '심장의 주인'에 대한 기밀들도 있었습니다."

 

시간 이동을 이뤄낸 대마법사의 개인 지도를 이 년이나 받았으면서 마법엔 까막눈이라는 사실을 인증받다니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소년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이 소탈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미래에서 알게 됐다잖아. 그게 거짓말이라는 근거도 못 찾아내서 결국 나한테 보고가 올라온 건데, 그럼 얘기를 좀 해 봐야지. 사람을 저렇게 묶어놓고 대화가 되겠어?"

 

숨통을 턱턱 막던 재갈이 순식간에 치워지고 다소 거칠게나마 안경까지 다시 씌워졌다. 그러나 여러모로 편안해진 몸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며칠이고 이어진 심문을 받던 어느 때보다도 긴장되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 때문이었다.

막시민은 이곳에 무작정 쳐들어온 이후 줄곧 만나게 해 달라고 주장했던 이름을 불렀다.

 

"베르나르 대공자십니까?"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그러나 단번에 알아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답 대신 입술을 끌어올려 웃었다. 생김새가 전혀 닮지 않은 남매는 그렇게 위정자의 얼굴로 꾸며 웃을 때의 표정만은 놀랄 만큼 비슷했다. 막시민은 과연 베르나르가 십 년 뒤 그처럼 웃게 된 동생을 예상했을지 궁금했다. 그런 얼굴은 시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져야 하는 짐이라고 생각했을까?

어느 쪽이든, 계획이 성공한다면 이번에는 베르나르가 열아홉 살의 동생을 직접 보고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이언페이스에 대해서 들었을 때는 꽤 놀랐어. 우리는 그를 심장의 주인이라고만 불렀거든, 그의 사회에서의 이름 같은 건 알 수 없어서."

 

984년의 베르나르는 모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막 실버스컬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고, 켈티카에서는 공화정이 무너지기 전의 마지막 사력을 다하고 있으며, 샤를로트의 다정한 오빠가 아직 옆에 있어 주었던, 그래서 열아홉 살의 샤를로트가 가장 안전한 곳으로 무의식중에 떠올린 시간대의 그는.

하지만 994년의 막시민은 아이언페이스와 대적하며 속속들이 알게 된 사실들이 많았고, 그는 그 지식으로 사후 대처 대신 사전 예방을 할 생각이었다. 그에 대해 설명을 들은 대공자는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고 막시민은 거기에 대답했다. 질문 중에는 막시민을 떠보려는 듯한 뻔한 것도 있었지만 놀랄 만큼 날카롭게 허를 찌르는 것도 있었다. 나긋나긋 온화한 태도와 달리 상대하기 녹록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든 누군가를 말로 설득해내는 데에 막시민 리프크네는 꽤 일가견이 있는 편이었다.

 

"내가 그의 심장을 가지고 있는 걸 그가 알게 된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한테 파이라도 구워 주러 오지야 않을 테니 날 붙잡으려 드는 것도 사리에 맞는 일이긴 하군. 자네 말처럼 그가 준비하고 있는 작당과 숨겨둔 장치들을 전부 미리 알 수 있다면 확실히 대비하기도 수월해질 테고 나도 무사히 몸을 건사할 수 있겠고."

"정확히는 심장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대공자님을 습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러 개로 쪼갠 심장을 다른 물건 속에 넣어 각지에 숨겨놓으셨거든요."

"아. 그건 아직 생각 중인 안이었는데 결국은 그렇게 하기로 됐나? 하지만 쪼갠 심장을 어떻게 겉보기엔 전혀 다른 물건으로 눈속임해서 숨길 수 있을지가 쉽지 않아서 말이야. 나름대로 고농축 에너지원이다 보니 그냥 아무 상자 같은 데다 넣으면 여러 사람 잡을 텐데."

"누오보의 오토마톤 권총 시리즈입니다. 아무래도 고대의 구조를 빌려 온 만큼 마력을 숨기기도, 이후에 추적하기도 쉬운 편이었습니다만, 말씀하신 대로 새어 나온 마력에 홀려서 신세가 안되게 된 사람도 있기야 있었죠."

"저런, 그렇다면 이번에는 쪼개지 않는 쪽이 좋을까. 자네 말대로 된다면 샤를로트에게 알려질 때까지 나는 아이언페이스에게 당하지 않고 심장을 지켜낼 수 있을 테니까. 기왕이면 끝까지 알리지 않는 편이 좋겠지만……."

 

평이하게 말하는 음색이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막시민이 그렇게 생각한 것을 눈치챈 듯이 대공자는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마법 능력이나 지식은 일반인 수준이라더니 심장을 다루는 법을 잘 아네. 네냐플에서는 그런 것도 가르치나? 마법이라면 나도 어느 정도 배워봤지만, 프시키를 다루기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힘이라서 쉽지가 않더라고."

"네냐플에서도 특별히는…… 저도 동생분과 다니면서 알게 된 것들이라서요."

"그거 아쉽군."

 

샤를로트는 자신이 아직 어릴 때 사라졌고 일곱 살이나 나이가 더 많았던 오빠를 회상할 때 늘 굉장히 성숙한 사람으로 묘사하곤 했다. 아마 무사히 살아남았더라면 충분히 그런 사람이 되었겠지만, 지금의 막시민은 스무 살이었고 베르나르는 열일곱 살이었기 때문에 막시민은 베르나르의 앳된 얼굴을 보면서 사실 약간의 괴리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처럼 아직 소년티가 남은 얼굴로 베르나르는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그 애를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았어."

 

내 어린 동생이 감당하기엔 너무 힘들고 무거운 일이니까, 내가 어떻게든 해주고 싶었지. 블러디드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책임에 내몰려야 한다니 너무 잔인한 일 아닌가. 그렇게 말하는 베르나르의 얼굴은 조금 쓸쓸한 것처럼도, 조금 화가 난 것처럼도 보였다.

그건 막시민이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 역시 지나치게 무거운 현실 앞에서 동생들을 지키려던 형이고 주어진 책무에 짓눌려 죽을 뻔했던 소년을 살리려던 친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는 일이니까요."

 

막시민은 내 무대에서 도망치지 않겠다고 단호한 얼굴로 말하던 조슈아를 생각했다. 목숨을 내놓고 다니는 것처럼 조상을 대신해서 기꺼이 죽어주겠다고 하던 얼굴 또한 생각했다. 그때 자신이 얼마나 화가 났었고 상처를 받았는지, 하지만 결국 어떻게 그의 옆에 끈질기게 남아 있었고 그를 살릴 수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자신도 그가 그러지 않기를 바랬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아예 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결정을 할 일이 처음부터 없게 만들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결국 조슈아 자신이 직접 겪고 선택해야 하는 일이었다. 막시민은 그의 바로 옆에서 그가 얼마나 깊이 고민했고 어떤 각오로 맞섰는지, 그게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전부 봐 왔다. 한때는 그렇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옆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이 결코 무력하거나 쓸모없기만 한 일이 아니란 것을 지금의 막시민은 알고 있었다.

 

"샤를로트도 거기서 도망치기보단 맞설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어 주길 더 바랄 겁니다."

 

……저도 그렇게 되길 바라고요. 그런 말을 덧붙이며 그 이름으로 그 애를 부른 건 처음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베르나르는 눈썹을 조금 들어 올렸다가 재미있다는 듯이 짧게 웃었다.

 

"여기 온 것도 그래서인가?"

"예?"

 

막시민은 잠시 화제를 따라가지 못하고 눈을 끔뻑거렸다.

 

"난 처음부터 그게 궁금했거든. 시간 여행은 일단 믿고 보더라도, 대체 왜 나한테 왔는지 알 수가 없는 거야."

"지금까지 설명한 거 듣고 계셨던 거 맞죠?"

 

막시민은 의심스럽게 대공자를 보았다. 옆에 선 시위가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베르나르는 개의치 않고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내 실종을 미리 막으려고 왔다고, 알아, 알아. 하지만 자네가 왜 그걸 막지?"

 

영락없이 첩자나 사기꾼으로 의심받은 막시민은 심문을 받는 동안 타임트립의 경위를 포함해 십구 년 인생사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낱낱이 구술했다. 그러다가 사소한 토씨 하나라도 틀리면 금세 날카로운 추궁이 날아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러길 삼 일쯤 지나자 목이 갈라지고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베르나르는 그 기록이 담겨 있을 진술서 뭉치를 가볍게 두들겼다.

 

"시간을 뛰어넘는다면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나 바꾸고 싶은 일이 누구나 한두 가지쯤 있을 것 아닌가? 켈티카로 가서 자네 부친이라도 찾아본다든가, 동생들 살림을 좀 도와줄 수도 있고."

 

막시민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의 안에서는 이미 확고하게 답이 나온 문제였다.

 

"이맘때면 아버지는 이미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된 시점입니다. 켈티카로 가면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수도 공성전에 휘말려 다치거나 죽으면 저는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가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걸 감수할 만큼 아버지가 필요하거나 그리웠던 적은 없습니다."

"동생들은?"

"지금 고향에 돌아가면 저 자신과 마주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이 시간 이동은 싸우고 있었던 장소에 널려 있던 킵더스트라는 마법 물질과 시간을 다루는 제 바이올린의 영향을 받아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 무사히 돌아가기까지 위험 변수가 너무 많습니다."

 

매끄러운 대답에도 대공자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했다. 그가 궁금한 것은 그런 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뭐 그도 아니면 금맥이 터질 땅이라도 미리 사둔다든가, 아무튼 알고 지낸 지 일 년도 안 됐다는 사람의 가족사 때문에 남의 나라 정치판에 제 발로 뛰어드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고 구미가 당길 일이 많지 않은가 하는 말이야."

"……."

"그런데 왜 여길 왔지?"

 

타당한 의문이었다. 그러나 막시민은 대공자와 마주 앉고 나서 처음으로 쉽게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이런 질문을 예상하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답을 몰라서도 아니었다. 십 년 전의 오를란느에 떨어진 것을 알게 되자마자 무엇보다도 바로 그 사람을 떠올렸을 때부터 깨닫고 있었다. 무사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나 나무껍질을 벗겨 먹던 어린 날의 궁핍한 기억보다 호의호식하고 있을 먼 나라 공주님이 깊은 밤 혼자 시달릴 악몽이 더욱 신경 쓰여 어떻게든 그 애가 혼자 울지 않아도 되는 미래를 만들어 주고 싶어지는 마음의 이름 같은 것은.

그러나 막상 입 밖에 꺼내기란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놓인 남자가 할 수 있는 말이라야 뻔한 법이고 주저가 길어질수록 의심만 커질 것을 아는데도 그랬다. 입술만 달싹이는 모습을 가만히 보던 베르나르 대공자가 장난스레 입술을 비틀었다.

 

"내 동생은 못 준다! 같은 건 아직 십 년쯤 이른 일인 줄 알았는데 말이지."

"예?"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연습이라도 해 볼 걸 그랬지 뭐야. 싱겁게 웃은 대공자가 손짓했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경비병이 다가오더니 묶여 있던 팔과 다리의 밧줄을 썩둑 잘라냈다. 갑자기 자유로워진 팔다리가 되레 얼얼해 바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버벅대는 막시민을 보고 대공자가 빙긋 웃었다.

 

"한 달 뒤에 마법석을 다시 쓸 수 있다고 했지. 어디 머물 데도 없을 테고, 본인이 세운 계획이니 그동안 날 좀 도와주지 않겠어?"

 

 

* * *

"그러고 보니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세 번째인가 네 번째로 아이언페이스가 숨겨 놓은 장치를 발견하고 파괴한 뒤 내려오던 길이었다. 막시민은 네이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지금 꼭 해야 하는 얘긴가? 피곤한데."

"아, 피곤하면 쉬러 가든가. 그럼 내일 좀 더 오래 떠돌게 될지도 모르지만 뭐, 프시키가 안 느껴지면 그걸 어떡하겠어?"

"……말해봐."

 

심문실에서 풀려난 뒤로 막시민은 주로 네이와 함께 다녔다. 프시키를 시각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네이와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막시민이 이 일을 수행하기에 가장 적절한 인력 배치였기 때문이다. 아직도 막시민을 수상쩍은 사기꾼으로 여기며 노골적으로 거리껴 하는 측근들 중에서 평소 괴팍한 성정으로 악명높은 네이만이 그를 쉽게 받아들였다는 점도 물론 중요한 이유였는데, 사실 특별히 그를 마음에 들어 해서라기보다 대공자 외의 누구든 공평하게 마음에 안 들어 해서에 가까워 보이기는 했다. 어쨌든 막시민도 함께 있는 상대가 자길 마음에 들어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태연히 먹고 잘 수 있는 굵은 신경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상관은 없었다.

 

"너 말야, 대공자님이 숨기신 초콜릿 권총을 찾던 공녀님한테 고용돼서 같이 다니게 된 거라며?"

"맞는데."

 

초콜릿 권총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유치한 작명이라면서 비웃더니 어느샌가 자기도 사용하고 있다. 꼭 그걸 돌려주자는 것은 아니었지만, 막시민은 코웃음을 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공녀님이 혼자 권총들을 찾아내려고 애쓰게 될 일은 없어질 테고. 그러면 결국 둘이 만날 일 자체가 없어지는 거 아니야? 넌 어떻게 되는 건데?"

"아, 안 그래도 그 아저씨…… 이름 뭐더라. 마법사가 그러더라고. 마법석을 쓰면 걜 만나기 이전의 가장 가까운 시간대로 돌아갈 확률이 높다고. 미래가 바뀌었을 테니까."

 

아마 학기 마지막 날 아닐까? 기왕이면 시험 보기 전날로는 안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막시민은 한가롭게 말을 이었다. 네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공자의 다른 수하들이 그렇듯 막시민이 공녀를 부르는 편한 지칭을 불편하게 여겨서는 아니었다.

 

"그 공녀님한테 홀딱 반해서 여기까지 쫓아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그렇게 돼도 상관없는 거야?"

"글쎄, 뭐 그렇게 된다면……."

 

피곤하다는 막시민이 좀 더 앞서서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으므로 네이에게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잘된 일이지. 정체도 확실치 않은 주정뱅이 탐정 하나 믿고 고용하겠다고 대륙을 반이나 가로질러서 찾아올 만큼 걔가 혼자 구석에 몰리는 일은 안 생긴단 뜻이잖아."

 

그러나 말의 내용과 달리 어조는 여전히 평탄했다. 네이는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보통 갓 스무 살 된 풋내기들이 저러던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평소 다른 사람의 일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었지만 호기심이 일었다.

 

"그 옆에 네가 없어도?"

 

막시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두 사람은 나란히 걷고 있었으므로 네이에게는 그의 표정이 잘 보였다.

어느 시간대에서나 똑같이 따스한 빛깔로 내리는 낙조가 그 얼굴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세상에, 대공자님께서 동생 자랑을 하실 때는 흔한 고슴도치려니 했는데. 그 공녀님은 대체 어떤 엄청난 매력이 있길래 이렇게까지 절절한 짝사랑을 받는지 궁금한 지경인걸."

"내가 알기론 당신도 걔 광팬으로 유명했어. 측근들이 당신 이름 들으면 무서워하던데."

"와우, 그 말을 들으니 더욱 기대되는데?"

 

네이가 깔깔 웃었다. 막시민은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또다시 지겨운 대거리를 하기엔 정말로 몸이 피곤했으므로 발을 재촉했다.

* * *

시종은 대공자의 앞선 일정이 늦어지고 있다며 정중한 양해의 말과 함께 새로 끓인 홍차를 두 번째로 내주었다. 아무리 푹신한 의자라도 하염없이 기다리느라 엉덩이가 배길 지경이었으므로 막시민은 홍차를 마시는 대신 일어나 방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처럼 딱한 모양새를 본 시종은 여전히 진중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정원이라도 잠시 산책하시면 어떻겠냐고 권해 왔다. 특별히 오를리 궁의 조경이 궁금한 것은 아니었지만 방 안이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참이었으므로 막시민은 권유에 따라 잘 꾸며진 산책로를 걷기로 했다.

이제 돌아올 대공자에게서 검사를 마친 마법석을 돌려받으면 이 시간대에도 이 나라에도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관목과 화초들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왔다. 막시민의 눈에 익은 나무나 꽃들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는데, 그게 고향보다 추운 기후 탓인지 아니면 궁정에 걸맞은 무슨 고급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그냥 자라는 대로 두는 대신 그림처럼 예쁘게 모양을 내어 가꾼 조경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로 잰 것처럼 깔끔하게 가지치기를 한 생울타리를 따라 걷던 중에 유독 흐트러진 전정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끌었다. 정원사가 저 부분만 빼놓고 작업을 했을 리도 없을 텐데, 바람 한 점 없는 잔가지가 조금씩 흔들리기까지 했다.

 

"네냐플 뒷산에서 새나 고양이가 덤불에 숨어있다가 사람 오면 뛰쳐나갈 때 딱 저렇긴 한데."

 

하지만 설마하니 이 정원에 그런 동물들이 나돌아다닐까? 호기심에 가까이 가자 생울타리는 멀리서 봤을 때보다 좀 더 엉망으로 파헤쳐져 있었다. 막시민은 그 안쪽을 들여다보려 몸을 굽혔다. 그리고,

 

"어……."

 

가장 처음 마주친 것은 눈. 까맣고 동그란.

늘 짧게 자른 모습만 봤던 머리카락은 정수리 위에 동그랗게 말린 채로 올라가 있었지만 도톰한 뺨과 살짝 올라간 입매는 몰라볼 수가 없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덤불 속에 숨어있느라 바닥에 마구잡이로 끌린 옷자락은 숨바꼭질하는 어린아이가 자주 그러하듯이 잔뜩 더러워져 있었다. 그러나 술래 대신 먼저 자신을 찾아내 버린 낯선 불청객 앞에서, 어린 샤를로트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넌 누구야?"

"아, 음, 그러니까."

 

막시민은 일생 이렇게 당황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언페이스 앞에 끌려갔을 때도 이렇게까지 머릿속이 백지가 된 기분은 아니었다. 둘러댈 말을 찾지 못해 쩔쩔매는 그를 동그래진 눈으로 쳐다보던 샤를로트가 곧 아, 하고 소리를 쳤다.

 

"알았다, 내가 맞춰볼게."

"뭐?"

"에투알 수련병이지? 오늘 궁에서 사열이 있다고 했거든!"

 

힘들어서 쉬려고 몰래 빠져나온 거지? 내가 숨겨줄게. 그 대신 너도 나 못 본 척해줘야 돼? '에투알 수련병'이라고 여긴 상대에게 삽시간에 친근감을 느낀 듯한 샤를로트는 작은 새처럼 재잘거리며 막시민의 팔을 산울타리 밑으로 잡아끌었다. 첫 만남부터 검을 들이대던 그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경계가 옅고 스스럼없는 모습이었다. 돌아다닐 사람의 신원이 빤한 궁정 안이니 그렇겠고,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막시민은 일단 장단을 맞춰 바닥에 주저앉으며 시답잖은 궁금증부터 물어보았다.

 

"그런데 왜 내가 에투알도 아니고 수련병이냐? 그것도 힘들어서 땡땡이치는."

"오빠가 에투알은 전부 혼자서도 연대 하나랑 맞먹을 수 있는 대단한 검사들이라고 했는걸."

"……."

 

에투알들은 누구랄 것 없이 걸어 다니는 근육 덩어리 전투 기계들이고, 막시민도 어디서 허약하다거나 깡말랐다는 소리를 들을 사람은 아니지만 그들에 비할 만큼은 못 됐으므로 사실이 맞기는 맞았다. 맞기는 맞는데.

틀린 말도 악의를 가지고 한 말도 아니었지만 대단히 묘한 기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련병을 만나 들뜬 샤를로트가 찝찝한 표정을 하고 있는 막시민의 소맷자락을 친근하게 잡아당겼다.

 

"있잖아, 에투알 얘기해 줘. 수련병들은 정말 한 숙소에서 다 같이 살아? 에투알은 하나씩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게 진짜야?"

 

훈련은, 일과는, 휴일과 동료들은... 샤를로트는 천진하게 눈을 반짝이며 끝도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그가 정말로 에투알 수련병이라 전부 대답해줄 수 있는 내용이라면 그대로 하나씩 이야기해줘도 좋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물론 에투알이 아니었고, 개인적으로 아는 에투알 또한 한 명뿐이라 대화가 길어지면 금방 밑천이 바닥날 게 뻔했으므로 막시민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누굴 찾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앗."

 

샤를로트는 금세 재잘대던 것을 멈추고 머리를 팔 안쪽으로 쏙 집어넣었다. 물론 그런 소리 따위는 처음부터 들린 적도 없었지만, 잔바람마저 잦아들 때까지 미동도 없이 버티는 모습이 퍽 진지했다. 막시민은 픽 웃으며 그만 일어나라고 머리를 쓸어 주었다. 푸하, 참았던 숨을 한 번에 내쉬며 고개를 반짝 드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대체 뭘 했길래 숨고 있는 거냐?"

"으음……."

 

샤를로트는 힐끔 막시민의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사고를 친 아이들 특유의 눈치 보는 표정으로 소곤소곤 고백했다.

 

"내가 검술 연습복을 다 물감 푼 물에 담가놨거든."

"왜?"

"그러면 발레복을 입고 검술 수업을 받으러 갈 수 있을 테니까."

 

샤를로트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고 제일 많이 입는 옷을 오빠가 검술 수업에 못 입고 가게 한 일에 대해 그게 얼마나 '불합리'한 '냉혈한'의 행실이었는지 고시랑고시랑 일러댔다(심통이 난 아이의 입장에서 다분히 왜곡된 표현일 거라고 막시민은 짐작했다). 뺨을 부풀리며 조잘거리는 얼굴은 그가 아는 십 년 뒤의 그 애와 똑 닮았는데, 내용은 그 애에게서 들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종류의 것이어서 막시민은 그야말로 웃을 수도 웃지 않을 수도 없는 기분이었다. 야단 좀 쳤다고 옷을 죄다 물에 담가버리다니 과연 어릴 때부터 성깔 하나는 대찼나 보다, 생각하다가 막시민은 조금 전부터 심중에 떠오른 생각을 입에 담았다.

 

"그렇게 발레를 좋아하면서 왜 검을 배워서에투알이 되려는 거냐?"

 

답을 모르는 질문은 아니었다. 모르는 질문은 아니었는데.

 

"오빠를 지켜줘야 하니까."

 

아직 어린 그 애의 목소리로 듣자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이 되었다.

 

"그러니까 아주아주 강하고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하거든. 누구보다도 제일 강하고, 절대로 아프지도 힘들지도 않고, 혼자서도 거침없이 뭐든지 다 해낼 수 있는에투알 브릴랑테같은 사람."

 

그렇게 말하고, 샤를로트는 양 뺨이 도드라지도록 입을 꾹 다물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막시민은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그러지 않아도 돼."

"응?"

 

샤를로트는 동그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막시민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 보였다.

 

"나는 누구보다도 멋지고 대단한 에투알을 한 명 알거든."

"진짜? 어떤 사람인데?"

 

흥미를 끄는 이야기를 듣자 작은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그것을 보며 막시민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이스핀의 얼굴을 생각했다. 강하고 단단하지도, 그렇다고 저렇게 환하지도 않았던.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지. 사실 속으로 아프기도 하고 힘들어하는 것도 많고 혼자서 못하는 것도 많고, 그런데 본인은 애써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고 그러려고 하고, 하지만 결국은 그렇게 되지 못하고."

 

이스핀은 그때 마법석을 쓰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늘 냉철하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최우선 경호 목표의 생존에 가장 효율적인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따라야 하는 에투알의 행동 원칙대로라면 사실은 쓰지 않는 게 맞았다. 그 자리에서 가장 다치거나 죽었을 때 파급력이 클 인물은 이스핀 자신이었고, 그 애는 스스로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책임의 무게를 충분히 알고 있었으니까. 스스로의 의향보다도 중시할 만큼.

하지만 이스핀은 주저 없이 마법석을 썼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더 대단하고 강한 거야."

"이상한 말이네. 잘 모르겠어."

"지금은 몰라도 돼. 나중에 힘들거나 괴로운 일이 있으면 그때 생각해 봐. 꼭 혼자서 다 참고 해내는 것보단 다른 게 더 강해질 수도 있는 거야."

 

샤를로트가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막시민은 더 말하지 않고 웃었다.

곧 사라진 어린 공녀를 찾는 소리가, 이번에는 정말로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막시민은 샤를로트를 일으켜 세웠다.

 

"누가 너 찾는다. 나가서 잘못했다고 해. 아무리 그래도 옷을 다 염색해버리는 게 어딨냐? 내 동생 놈들이 그랬으면 기절했어."

"흥."

 

샤를로트는 부루퉁하게 입을 다문 채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덤불 속에 숨어 있느라 엉망이 된 옷차림을 대충 정돈해 준 막시민이 자, 그럼 가라, 하고 몸을 일으켜 뒤돌았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등 뒤에서 샤를로트가 그를 다급하게 불렀다. 저기!

 

"내 이름은 샤를로트야. 너는?"

 

발걸음이 잠깐 멈췄다. 잘 들어놓고 기억해야지, 나중에 또 만날 수 있게. 기다리는 샤를로트의 뒤에서 숨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공녀님! 이런 데 계셨어요?"

"아, 소피!"

"위험하게 이런 데 혼자 계시면 어떡해요? 옷은 또 이게 뭐예요, 정말이지."

"있잖아, 들어 봐. 저 사람이……."

 

시녀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돌린 샤를로트의 말문이 막혔다. 분명히 거기에 있었던 낯선 사람은 그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다. 깜짝 놀란 샤를로트가 시녀들의 손을 뿌리치고 뛰어나가 둘러봤지만 어딜 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생울타리 아래로 숨을 때처럼 흠 하나 기척 하나 없이 단정한 정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있었는데……."

 

울상을 지은 소녀의 발아래 땅바닥을 어지러트린 잎사귀들만이 비밀스러운 흔적처럼 남아있었다.

* * *

그리고 다시, 11월 말일의 오렌지 나무 술집.

 

"이 자식이 아라종 블루 노래를 부르더니 뭘 술잔 앞에 두고 넋을 빼고 있어. 안 마실 거면 우리 예쁜이 도로 넣는다?"

 

막시민은 셔츠 자락으로 안경을 닦는 중이었다. 깨끗해진 안경을 다시 쓰자 술잔을 치우는 시늉을 하며 퉁박을 놓는 벅의 모습이 느리게 또렷해졌다.

 

"천천히 향을 즐기는 중이지. 원래 좋은 술은 그렇게 마시는 법이거든?"

"어이구, 말이나 못 하면."

 

시간여행에서 돌아왔다고 해도 993년 11월의 막시민 리프크네에게서 크게 바뀐 점은 없었다. 물론 눈에 띄는 변화도 몇 가지 있기는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외부 소식에 밝은 학생들을 수소문해서 알아본바 베르나르 대공자는 사 년 전에도 실종되지 않았고, 막시민의 장부에서 멀베리 파이크의 인형 권총은 사라져 있었다. 그 외에도 사소한 것들, 예를 들어 린디즈의 올해 신제품이 밤 절임에서 라임 절임으로 바뀌었다거나 하는 변화들은 있었으나 막시민의 삶에서 중요한 일들은 대체로 그대로였다. 똑같이 시험을 보고, 똑같이 술집 구석에서 탐정 일을 하고, 똑같이 술을 마시고.

벅은 카운터 위에 널브러진 카드 더미 속에서 카드 한 장을 뽑더니 코스터처럼 잔 아래 끼워 주었다.

 

"자, 덤으로 행운의 카드 한 장."

 

아저씨가 카드를 원래 이 타이밍에 줬던가? 정확하진 않지만 좀 더 일찍 줬던 거 같은데. 아무려나 크게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참 고집도 좋아, 그렇게 내 퇴학을 막고 싶은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술잔을 집어 들고 맛을 보려는데 등 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 옵쇼."

 

술집에 오기에는 퍽 이른 시간이었지만 시험이 끝난 날이었으므로 자신이 세상 끝에 놓였다고 굳게 믿는 불행한 학생 한두 명쯤 온다고 해서 놀랄 일도 아니었다. 관심을 두지 않고 술을 마시려는 막시민의 귀에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 문답이 들려왔다.

 

"그런데 손님, 이런 데 오시긴 좀 이른 것 같습니다만?"

"그렇지는 않아요."

 

이 목소리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들려올 리가 없다. 상반된 혼란 속에서 고개를 돌린 막시민의 입에서, 다시는 불러볼 일 없을 거라고 여겼던 이름이 흘러나왔다.

 

"……이스핀?"

 

동글동글한 눈매가 순간 찌푸려졌다. 그러나 너무 당황해서 지금 이 시간대의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어야 하는 이름을 무심코 불러버린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막시민은 말을 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냐?"

 

자리에 앉으려던 이스핀이 한발 물러서 의심의 눈길로 막시민을 보았다. 귀여운 여행객의 모습을 하고 있던 얼굴이 단숨에 사나워졌다.

 

"어떻게 그 이름을 알지?"

"어, 아니 그 뭐냐, 닮은 학교 후배가 있어서…… 어, 동명이인을 착각했지 뭐냐, 이런 우연도 다 있네."

"네냐플 재학생 중엔 이스핀이라는 이름의 학생이 없을 텐데?"

"그건 대체 왜 알고 있는 건데?"

 

그야 물론 이번에는 탐정을 고용하러가 아니라 남부 여행 겸 내년 입학시험을 칠까 말까 고민 중인 학교를 구경하러 와 본 것이어서 약간의 사전 조사를 했기 때문이었지만, 막시민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마주친 적이 없는 사람인데도 잘 아는 사이처럼 이름을 부르고, 그런데 왜냐고 물어보자 거짓말로 회피하다니 아무래도 영 수상쩍은 상대라고 생각했는지, 이스핀이 입술을 깨물고 체크무늬 반망토 안으로 손을 넣더니 지그시 쥐었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잘 알고 있는 막시민은 기겁을 했다.

 

"대답해. 경우에 따라선……."

"칼! 칼부터 치워야 뭘 말을 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야, 너 진짜 아무 데서나 칼부터 뽑으려고 드는 버릇 좀 고쳐!"

"버릇? 네가 나한테 무슨 버릇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내가 지금 칼을 쥔 건지 아닌진 어떻게 알고? 너 진짜 뭐야?!"

"칼이라고? 내 가게에서 칼부림은 안 돼!"

 

오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와중에 갑자기 흉흉한 싸움을 눈앞에 둔 오렌지 벅까지 혼비백산을 하자 상황은 더욱 혼란스러워지기만 했다. 차마 관계없는 일반인인 오렌지 벅의 사업장 안에서 검을 꺼내기는 역시 꺼려졌는지 주위를 둘러보는 이스핀의 눈길에 막시민이 옆에 걸려있던 램프를 재빨리 높게 들어 올렸는데, 불타는 원숭이를 다시 한번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그로서는 반사적인 행동이었지만 공교롭게도 그게 더욱 오해를 산 모양이었다. "너, 이런 나무 건물 안에서 대체 무슨……." "아니거든!" 원래 불장난을 한 건 너였다고 말할 수 없는 막시민은 대단히 억울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노려보는 친숙한 얼굴이 지금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이 조금, 사실은 매우, 기쁘기도 했다. 진정하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때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공녀와 탐정이 다시 한번 만난 날이었다.

 

* * *

 

 

네가 혼자 울지 않을 수 있는 미래를 네게 주고 싶다. 설령 그 옆에 내가 없더라도 괜찮다.

언젠가는 반드시 네가 나를 찾아내서, 그 미래에서도 우리는 다시 만날 테니까.

 

안녕, 낯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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